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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 근본적 질문, 한국이 꼭 첨단기술 선도해야?

[2024 키플랫폼 - 디지털 전환 시대의 혁신과 리더십] 최병엽 전 동화기업 전무 인터뷰

조철희 | 2024.03.06 09:10

편집자주 |  우리 삶을 바꿀 중대한 글로벌 이슈와 어젠다를 톺아보는 머니투데이 연례 콘퍼런스 키플랫폼(K.E.Y. PLATFORM)이 2024년 우리 기업들이 현재의 경제 생태계에서 살아남고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디지털 전환(DX)을 위한 혁신과 리더십에 대해 국내외 최고 전문가들의 인사이트를 지상중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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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워드'(Buzzword). 새롭게 떠올라 주목받는 기술이나 현상을 뜻하는 IT 분야 용어이지만 꼭 좋은 의미만은 아니다. 한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도,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미명'(美名)일 수도 있다.

우리가 꽤 오랫동안 되뇌고 있는 '신기술'이나 '혁신', 그리고 최근 많이들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디지털 전환'도 버즈워드다.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호에 그치고 말 수도 있다. 실제로 디지털 전환이라는 미명 하에 실속 없는 일을 벌이는 기업들이 적잖다.

"버즈워드에 휘둘리지 말자." SK, 신세계와 같은 대기업을 비롯해 중견 제조업체 등에서 10여년 간 디지털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던 최병엽 전 동화기업 전무가 그동안 치열한 실험과 경험을 통해 얻은 여러 교훈들 중 하나다.

최 전 전무는 "외부의 화려한 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회사에 정말 필요한 디지털 기술은 무엇인지, 어느 부분에 그것을 적용하면 좋을지를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기업들이 꼭 첨단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하고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가는 게 좋을지 미래상을 정하고, 거기에 필요한 기술들과 각자의 수준에 맞는 기술들을 도입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NHN(네이버)과 다음커뮤니케이션(카카오와 합병) 출신으로 IT 업계는 물론, 유통업과 제조업에서까지 디지털 혁신 업무를 지속해 온 최 전 전무를 만나 우리 기업들이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로부터 어떤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지, 디지털 전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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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엽 전 동화기업 전무


#뭔지도 모르고 했던 디지털 전환


우주에 로켓을 쏘아올리거나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드는 미국 기업들이 있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기업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자본이 막대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디지털이라는 미명을 좇아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기에 미국의 멋진 사례들을 카피해 보지만 잘 되기는 어렵죠.

유통업계의 사례를 떠올려 보면, 국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들이 여러 디지털 혁신 시도를 했지만 제대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존이 하는 것과 이마트가 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시장 규모 등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이죠. 게다가 미국에서도 그러한 혁신 시도가 성공했다고 볼수는 없죠.

우리 실정에 맞게 해야 하는데, 답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시행착오가 불가피합니다. '뭔가 해야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경영진도, 디지털 전환 책임자도 '하우투'(how-to)를 정확히 모릅니다. 그럼에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자'라며 일거리를 발굴하며 해왔던 것이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입니다.

회사의 리소스를 끌어모아 시도해서 한번에 대박이 나면 좋지만 실제로는 거의 잘 안됩니다. 성과가 나려면 핵심 사업으로 계속 밀어붙여야 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수익성을 고려해야 하는 기업의 속성상 장기간 밀어붙이기는 어려운 일이죠. 경영 상황이 변하거나, 적자가 쌓이고 비용이 배가되면, 담당 부서는 힘이 빠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폼나는 서비스가 우선순위 아냐


국내 한 유통회사에서 오프라인 매장의 디지털라이제이션, 즉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심리스(seamless)한 연결을 위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객이 매장을 방문해서 스마트폰을 통해 제품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있게 하거나, 고객이 판촉 상품 근처에 오면 할인 쿠폰 등을 스마트폰 푸시 알림 형태로 보내주는 위치 기반 서비스 비컨을 통해 고객의 디지털 경험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고객의 '매장 내 사용자경험'(in-store experience)을 향상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고객들의 모바일 앱 이용을 유도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고객들이 모바일 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영업에 유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디지털라이제이션의 해외 선진사례를 보고, 머릿속으로 가졌던 아이디어를 현장에 적용했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습니다.

고객 대상의 디지털 서비스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폼나는' 서비스에 집중하는 것은 적절한 우선순위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령, 신문사 웹사이트의 일 사용자가 10만명 수준인데 50만명은 되어야 추진할 만한 '로그인 월'(로그인한 이용자만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서비스와 같은 개인화 서비스를 만드는 건 추진부서의 성과주의일 수 있습니다. 먼저 웹사이트 최적화 및 디지털 마케팅 등을 통해 50만명으로 늘리는게 우선되어야죠. 그리고 자사 플랫폼에 대한 과대한 기대를 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보다는 카카오톡처럼 고객들이 많이 사용하는 소셜플랫폼을 활용하는데 더 집중할 필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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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아니라 내부 직원이 더 중요할 수도


디지털 전환 업무는 온라인 부서와 오프라인 부서 간에 사일로(silo, 영역 다툼) 문제를 자주 겪습니다. 오프라인의 현업들이 온라인 프로젝트를 많이 도와줘야 합니다. 현업들이 새로운 디지털 시스템을 써가면서 피드백도 주고 해야 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매우 바쁘더라고요. 실적에 치이면 새로운 걸 할 시간도 없습니다. 디지털 전환을 하는 과정에서 고객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 직원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데이터 역시 의미 있는 데이터를 직원들에게 줘야 합니다. 영업이 중요한 회사라면 영업사원에게 줘야 합니다. 직원 개인의 경험과 역량, 인사이트가 있기 때문에 그 데이터를 참고삼아 영업을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영업사원의 일하는 방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스마트 팩토리에서도 설비 운용 직원들이 참고할 수 있는 데이터가 중요합니다. 제가 중견 제조업체에서도 디지털 전환 일을 했는데, 대기업이 대규모 공장을 위해 만든 스마트 팩토리 솔루션을 일부 공장에 도입하였더군요. 그 업체의 제조공정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솔루션 구축비와 운영비용도 많이 들었구요. 자동차로 치면 트럭용 솔루션을 소형차에 사용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솔루션을 만들어 데이터를 수집하고 여러 혁신을 내부적으로 추진했습니다. 20~30년 숙련된 설비 운용 직원들은 고도의 경험과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숙련 직원들에게 참고할 데이터들을 많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십년간 일한 사람들의 휴먼 인사이트보다 빅데이터에서 더 좋은 게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휴먼 인사이트와 비슷한 것밖에 못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판단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문가 인사이트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으면 굳이 안 해도 되잖아요.



#꼭 필요한 곳에서 디지털 전환해야


대형마트의 잔뼈가 굵은 내부 전문가들은 내부 데이터를 통해서도 자신들의 업무 경험과 결합하여 충분히 고객동선이나 소비성향을 고려해 상품배치 등을 할 수 있습니다. 기존 기간계 시스템(Backbone System, 구매·재고·생산 등의 IT 관리 시스템)의 데이터에 약간의 분석도구가 제공되면 그들의 인사이트와 결합돼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와 별도로 뭔가의 '빅데이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으로 얼마나 더 많은 효과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오프라인에 디지털 기반 기술을 연계해 비즈니스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시도를 해봤지만 '우리는 디지털 쪽으로 뭔가를 하고 있어'라는 언론 노출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 정도 외에는 실질적으로 성과를 얻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내부 직원들이 사용하는 업무용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게 실질적으로 더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직원들이 내부에서 일하는데 정말 필요한 부분에서 디지털 전환을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문사를 예로 들면, 자사 홈페이지를 찾아오는 구독자들 대상의 디지털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것보다 내부 기자들의 업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CMS(Content Management System)를 개선하는 게 더 우선순위가 높은 것일 수 있습니다. 폼나는 것보다 실질적인 개선을 통한 가치 예측으로 우선순위를 잡아야 하는데, 고객향 디지털 서비스보다 내부 직원용 시스템 개선이 의외로 더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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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것에 휘둘리지 말라


요즘 버즈워드가 많죠. 2~3년에는 메타버스, 지난해부터는 생성형 AI 같은 것들이죠. 그런 외부의 화려한 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메타버스가 떴을 때 제조업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분야로 디지털 트윈을 들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같은 목적의 일을 하는데 굳이 AR 글래스를 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PC 웹으로 원격으로 해도 되거든요. 챗GPT 같은 생성형 AI는 지식형 업무나 생산성 향상 도구로는 유용하지만, 엑셀만 잘 활용해도 할 수 있는 일에 굳이 챗GPT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챗GPT는 계속 더 발전할 겁니다. 완성도가 더 높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도구들이 많이 나올텐데 다 배우고 쓰게 할 게 아니라 회사에서 어떤 도구가 업무에 적합한지 판단해 먼저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회사에서 정말 필요한 디지털 기술은 무엇인지, 어느 부분에 그것을 적용하면 좋을지를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당장의 현안들도 있겠지만 2~3년 뒤의 미래상을 이루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커머스든 제조업이든 미디어 기업이든 우리 기업들이 꼭 첨단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하고 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 수년 후에 어떤 길을 가는 게 좋을지 미래상을 정하고, 거기에 필요한 기술들과 각자의 수준에 맞는 기술들을 도입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첨단기술의 수준을 따질 게 아니라 목표점에 맞는 수준의 기술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멋있는 게 아니라 진짜 많이 쓰는 곳에,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도 중요한 자산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왔던 디지털 전환의 경험들은 분명 데이터와 노하우를 남겼을 것입니다. 이는 회사의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를 새로운 의사결정을 할 때 잘 활용해야 합니다.

디지털 전환을 위해 외부에서 새로운 인력을 영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입된 사람이 이전의 데이터와 노하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사에 새로 온 사람들은 기존에 했던 것을 무시하고 판을 엎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회사가 해왔던 것들의 장단점과 문제점들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 기존의 노하우들, 이미 나와 있는 솔루션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